대우건설 이어 재계 순위 13위 올랐던 기업이 4년 만에 부도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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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NEYGROUND

디지털뉴스팀]

70

년대 신생기업의 대명사로 꼽히는 



율산그룹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앙팡테리블



로 기억되고 있다

.

율산그룹은 

20

대 청년들이 회사를 설립해 

4

년 만에 

14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대그룹으로 성장시킨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화려하게 솟아올랐던 율산은 창업 4년 만에 부도를 안게 되어 허망하게 끝을 맞이한다

.

율산의 성장과 몰락의 이면에는 청년들의 패기

,

정경유착

,

수출지상주의 등 

70

년대 당시 한국경제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녹아있다

.

재계 순위 

13

위까지 올랐던 율산그룹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
20대 서울대 청년들

자본금 500만 원으로

율산실업 세워

1975년 6월 17일 서울대 공대를 나온 신선호가 27세에 오퍼상(무역대리업)으로 번 돈으로 자신의 동향 친구들과 함께 자본금 500만 원으로 율산실업을 세운 것이 효시가 되었다. 70년대를 풍미한 ‘율산신화’의 시발점이라고 관계자들은 말했다. 20대 후반의 사업가들로 구성된 율산은 젊은 패기와 추진력, 아이디어를 내세워 곧바로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창업 초기 율산은 중동 붐을 탔다. 중동 건축자재 수출로 기반을 닦은 것이다. 창업 첫해만에 340만 달러의 실적을 올린 율산은 부실기업인 신진알미늄을 인수해 재계를 놀라게 했다. 동원건설도 인수하여 건설업까지도 손을 뻗어 나갔다.
창업 이듬해인 

76

년 율산은 금룡해운과 동원건설을 잇따라 인수하고 

4300

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하였다

. 77

년 경흥물산 등 

5

개 회사를 추가로 인수해 사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

율산은 전년도 보다 

4

배 이상 늘어난 1억 6500만 달러를 수출해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78

년에는 

13

번째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게 되었다

.

초기에는 시멘트 수출로 의존했던 율산은 

78

년 말 율산실업을 필두로 율산건설

·

율산알미늄

·

경흥물산

·

율산해운

·

율산중공업

·

서울종합터미널

·

호텔내장산

·

동아공업 등 

14

개의 계열사와 

27

개의 해외지사

, 6

개의 합작법인을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
율산은 이어서 

77

년 

11

월 서울종합터미널

(

현 반포 고속버스터미널

)

부지 1만 8700여 평을 서울시로부터 사들이는 등 사업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

창업 3년 만에 율산은 건설 해운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신흥 재벌그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하였다

.

율산이 급속 성장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율산맨들의 노력과 집념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

특히 그 당시 박정희 정권의 수출지상주의 정책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되었다고 평가된다

.

박정희 정권은 수출업체들에 제공할 수 있는 최대한의 특혜를 베풀었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
박 정권은 외국 바이어로부터 신용장만 받아오면 이를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할 수 있도록 수출 기업에게 특혜를 주었다. 은행 대출 금리가 25%를 넘나들던 시절이었지만 수출 기업에게는 연 6% 저리로 대출해 주었다. 율산은 이런 흐름을 꽉 잡아 저돌적으로 수출에 총력을 쏟아부었다.

이 과정에서 율산은 정부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 율산이 창업 4년 만에 14개 회사를 신설 또는 인수할 수 있던 배경에는 정책대출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율산의 성장에 기여했던 대출 지원은 율산이 무너지는 또 다른 배경으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자금 운용에 ‘빨간불’ 악재 시작된 율산

1978년 ‘8.8 투기억제 조치‘로 율산에게 악재가 시작되었다. 부동산 열기가 급속하게 냉각되면서 율산건설이 분양 중이던 소라아파트가 팔리지 않았던 것이다. 주력 계열이었던 율산건설의 자금 운용에 빨간불이 들어오게 되었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율산은 주거래은행에 자금 지원을 요청해야 할 정도로 자금 사정이 악화되었다. 서울신탁은행은 두 차례에 걸쳐 총 70억 원의 긴급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지만 이 돈은 곧바로 단자사 빚을 갚는데 소진되어 율산의 자금난 해소에는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4

월 신선호 사장이 업무상 횡령 및 외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다

.

이로부터 사흘 후 율산그룹 전 계열사가 일괄 부도 처리되었다.

짧은 기간 급속도로 성장했던 율산은 사라지는 과정도 속전속결이었다고 관계자들은 말했다.

전문가들은 율산이 자금난에 봉착하게 된 이유에 대해 



자기자본의 뒷받침 없이 무리하게 은행돈을 끌어다 사업을 확장한 것



을 주요인으로 꼽았다

. 77

년 말 율산실업의 자기자본은 

12

억이었지만 부채는 

313

억 원이 넘어 부채비율이 

2600%

에 달할 정도였다

.
청와대 사칭한 괴한들에 납치… 이로 인해 청와대 눈 밖에 나

자금 관리 능력 부족도 부도의 주 요인이 되었지만 더 궁극적인 원인은 또 다른 사건에 의해서라고 율산 측은 주장하였다. 79년 1월 25일에 발생한 ‘신선호 사장 납치기도 사건’을 그 요인으로 꼽은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확실한 물증 제시는 어렵지만 이 사건이 부도와 연관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사건 이후 율산은 정부 및 금융당국으로부터 냉대를 받기 시작하였다고 율산 관계자 측은 주장하였다. 청와대를 사칭한 괴한들에게 납치된 사건이 언론에 알려져 율산은 청와대 측의 눈 밖에 났고 이후 각 계열사들은 은행관리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신선호 사장이 비리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면서 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1년 만에 경영권과 보유지분 애경그룹에 매각

율산이 해체되었지만 서울종합터미널은 지켰던 신선호 사장은 1994년 ‘센트럴시티’ 착공에 들어갔다. 1만 8천 평에 달하는 이 부지는 율산실업이 부도나면서도 끝까지 양도를 금지해둔 곳이라고 관계자들은 전하였다. 센트럴시티가 2000년에 완공되어 신선호 사장은 재기에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막상 다 짓고 보니 채무가 많아지고 영업 부진에 시달렸다. 신선호 사장은 1년 만에 경영권과 보유지분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센트럴시티는 2002년 애경그룹에 넘어가게 되면서 율산은 사실상 명을 다했다고 전문가들을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