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푸른 눈이 목격한 광주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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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츠페터가 찍은 광주















독일에 방영된

광주 참상









1963년에 당시 서독의 ARD 소속 방송국인 북부독일방송의 텔레비전 카메라맨으로 입사.

몇 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정권 하의 여러 공안 사건들에 대한 기록과

광주민주화운동 직전 가택 연금중이었던 김영삼과의 인터뷰를 녹화하는 등 다양한 취재를 하고 있었음.

5.18 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19일 그는 전라남도 광주시에 잠입해 영상을 찍게됨.










독일 제 1 공영방송 저녁8시 뉴스



[한국의 광주와 그 주변지역까지 확대된 민중봉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비공식 보고에 따르면 군대는 도시를 점령하기 위한 준비태세에 있다.

나흘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한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 광주는 시위대가 차지한다.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고 있고, 그 곳으로의 모든 텔렉스와 전화연결은 두절된 상태이다.










전두환 일파가 내란을 일으켰음이 명백해졌다.

적의 공격이 있어야 가능한 전국 비상계엄을 억지로 선포한 뒤 국회 기능마저 정지시켰다.

광주에서는 내란 목적으로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군부는 김대중을 체포했고 김영삼은 가택 연금시켰다.

힌츠페터는 일본 공항에서 3시간을 머문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광주로 내려가기 전 그는 김영삼의 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힌츠페터 기자, 그리고 그 옆이 녹음기사 헤닝이다.










나는 5월 23일 다시 광주로 들어갔다.

이제 광주 부근 고속도로에서 탱크와 헬기까지 볼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다시 샛길을 찾아 들어갔다.

시위대를 만난 우리는 안내를 부탁했다.

그 사이 군대는 외곽으로 철수해 시내는 조용했다.

우리는 바로 중심가로 향했다.









도청앞에서 많은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우리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시위대의 차를 타고 광장으로 들어갔다.

수요일 떠났던 광주에 금요일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틀만에 다시 돌아온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이들을 볼 수 있어 너무 기뻤다.










그사이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동안 희생된 사람의 관이 놓여진 가운데 사람들은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있었다.










이틀 전만 해도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제 여자와 노인들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띄었다











나는 연단 위로 올라가 연설자들의 바로 앞에서 촬영했다.

이곳의 연설은 그 소리까지 잘 녹음하기 위해 애썼다.

사건이 끝나고 나는 한국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이들의 모습을 많이 사용했다.










아들을 잃은 한 여자의 이야기도 필름에 담았다.













위험한 일이란 것은 알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올 때 나는 가방속에 신문을 몇장 숨겨왔다.

광주 시민들이 자신들의 일이 보도된 신문을 보고싶어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매우 관심있게 내가 가져온 신문을 봤다














나는 시가지를 돌아다녀봤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병원 창고같은 곳으로 들어가니 관들이 있었다.

그런데 관이 모자라서 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누워있는 시신들이 많았다.

나는 베트남전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부상당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많은 시신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죽은 사람의 가족들은 악을 쓰며 원통해하고 있었다.













도청 앞 작은 체육관 앞에는 새로 죽은 사람의 명단이 공개됐다













나는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죽은 자의 친구와 가족들이 와 있었다.

관은 모두 30여개 가량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이하게도 관은 밧줄에 묶여있었고 태극기를 덮어 장식하고 있었다.

한 학생은 관에 일련번호를 매기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한 가족이 원통하게 울고 있었다.










나는 30m나 되는 거리를 단 한번에 촬영했다.

한 여자와 그녀의 남편이 체육관이 떠나갈 정도로 통곡할 때까지 말이다.

아직도 그 소리가 생생하고 내 자료를 볼 때마다 그 소리가 들린다.

그 장면이 나를 슬프게 했고 오늘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비통한 심정이 된다.









변호사, 목사, 신부 등으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군과 협상을 한 후

그 결정에 따라 학생들이 총을 반납했다.

도청 안의 수위실로 보이는 곳이 바로 총기 반납 장소였다












시내는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과일과 음료수를 샀다.










고(故)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와
택시운전사 김사복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