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시인 김영랑은 모란이 피어야 진정으로 봄이 온 것이라 했다. 그리고 모란이 피는 봄은 찬란하지만 슬프다고 했다. 학창시절에 그냥 외우면서 읊조렸던 그 시의 뜻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백화가 난만하는 오월이 왜 유독 슬픔으로 다가오는 지를…

큼지막한 꽃송이와 두드러진 황금빛 꽃술에서 고귀한 기품이 느껴지는 모란과 작약, 동양 고전미의 대표급이라 가히 꽃중의 꽃 화왕(花王)과 화상(花相)이라 칭할 만 하다.

딱 하나 흠이라면 개화기간이 열흘도 채 되지 않는데, 꽃 한송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길어야 일주일이다. 봄의 한복판인 사월하순~오월초순에 모란이 먼저 피고, 약 한달후 작약이 그 뒤를 따른다. 그러니 모란이 아니라 작약이 피고 져야 봄날은 온전히 가는 셈이다.

속명이 '피오니아(Paeonia)'로 동일한 모란과 작약은 같은 집안의 자매지간이다. 그래서 얼굴로는 구별하기가 어렵지만 잎 모양과 생육 행태는 많이 다르다. 모란(牡丹, 목단)은 잎이 넓고 나무처럼 겨울을 나지만, 작약은 잎이 좁고 광택이 나며 풀처럼 겨울을 난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모란이 손위 같지만, 실은 작약이 언니뻘이다. 품종개량도 작약이 훨씬 먼저 시작되었고 슬하에 자손들도 모란보다 더 많다.

(위 잎모양 차이 : 모란 vs 작약)

그럼에도 작약보다 모란이 대중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것은 과거 유신시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선덕여왕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이 곧 여왕으로 즉위할 덕만공주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모란 그림 한 점과 씨앗 석 되를 선물로 보냈다. 어전회의 석상에서 덕만공주가 "이 꽃은 아름다우나 향기는 없음이 분명하다. 함께 그려져 있어야 할 나비가 없지 않은가?"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씨앗을 뿌려서 피운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결론부터 말해 모란은 향기가 있다. 여인의 분 냄새 같은 은은한 향기가 난다. 개량이 안 된 홑꽃 품종일수록 향기가 더 강해 제법 멀리까지 맡아진다. 골품제도의 틀에 갇혀 부득불 어린 여왕을 추대해야 했던 당시의 지배층이 덕만의 총명함을 애써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여기에 더해 <향 없는 모란 vs 향 있는 작약, 화왕 모란 vs 화상 작약>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은 이십여년 전에 방영된 TV사극 <장희빈>으로 인해 더욱 더 굳어졌다.

모란을 좋아하는 인현왕후와 작약을 좋아하는 장희빈이 꽃꽂이를 하면서 주고받는 대사가 그것이다. 장희빈은 "꽃이름에 비록 왕과 재상이라는 품계의 차이는 있으나, 향기가 있어야 벌과 나비가 찾아오지 않겠사옵니까?"라며 인현왕후의 처지를 빗대어 말한다.

우쨋든 모란과 작약은 부귀와 장수를 상징하며 동양화는 물론 이불이나 병풍의 그림에 빠지지 않은 단골소재가 되었다. 국민오락 동양화 화투장에도 유월 모란과 나비 두마리가 그려져 있다.^^

통상 피오니(Peony)라 불리는 작약 집안은 30여 품종이 있는데, 월동하는 형태에 따라 풀과 나무의 두가지 그룹으로 대별된다.

그 중에서도 원예용으로 보급된 대표적인 품종이 Paeonia lactiflora(작약)과 Paeonia suffruticosa(모란)이다. 둘 다 홑꽃-반겹꽃-겹꽃에 흰색-연핑크-레드-자주-노랑-흑색 등 여러가지 색상이 있는데, 모란 보다는 작약의 품종이 훨씬 더 다양하다. 꽃은 모란이 더 크지만, 향기는 작약이 더 강하다.

(아래 : 모란 개량종 vs 작약 개량종)

개화시기도 봄~초여름이 대부분이지만 가을과 심지어 겨울에도 개화하는 품종이 있다. 젊은 시절 웃소는 일본 도쿄 우에노공원에서 한겨울에 눈삿갓을 쓰고 피어있는 동모란(冬木丹)을 보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해마다 중국 북경에서는 원예박람회가 열린다 한다. 전세계의 희귀한 모란과 작약 백만송이가 한자리에 모인다 하니 버킷리스트에 올려 놓음직 하다.